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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귓속말 #홀로 찬찬히 읽기에 너무 좋은 책 #읽기와 쓰기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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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28 속닥속닥~~「소설가의 귓속말」
2020. 7. 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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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인데, 뭔가 신선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유를 하다니....

가장 -체하기를 잘 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나리오 상의 연기자(배우)들이 아닐까.

근본적으로 그 인물들을 만들어낸 작가(소설가)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인물들에게 각각의 말을 준다.

그 인물에게 부여된 조건에 맞는 목소리와 어조와 낱말을 골라 넣는다."

숨겨진 나의 삶, 나를 가장 드러내는 방법이 다른 사람을 통한 감정이입이란 도구를 통해 재현된다.

그래서 쓰는 것과 쓰는 사람은 흥미롭다. 자신의 결핍과 상실의 경험을 펼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니까.

쓰는 사람(소설가)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까? 「소설가의 귓속말」 많이 궁금해.

귓속말은 속닥속닥~ 비밀스런 말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공유하는 것인데,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게 무엇일까?

찬찬히 읽어보았다.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자연스레 이런 부류의 책이 궁금하다.

저자가 알기 쉽게 잘 쓰는 것 같다. 특히,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했는데 꽤 특별하게 다가왔다.

읽은 책과 줄거리, 삶의 경험한 부분 등 글 쓰기와 관련해서 잘 어우러진 듯 하다.

쉽게 쓰여졌다고 허투루 쓴 글이 아니었다. 읽는 사람의 성향과 눈높이에 맞았다고 생각된다.

의미있는 말들도 많아 메모지에 긁적여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은 어쨌든 남겨야하니깐. 매번 부담스러운 행위지만 뿌듯함도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에서 나와 합이 맞는 책이 있다. 구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크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느끼지만 읽는 마음가짐(자세)이/가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책이 나에게 말 걸어오는 모양새가 다르다.

책에 대해 미리 재단하는 자세가 안 좋은 것 같다.

내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 책과의 소통은 물 건너가고 형식적으로 읽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읽는 내가 마음을 주면 그 책은 어느새 내 생각의 흐름을 탄다.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읽으려는 마음도 과하게 되면 몰입을 방해한다.

공부하듯이 문장을 다 안으로 채우려고하면 지치게 된다.

읽고 정리하는 것에 부담이 있으니 자연스런 읽기에 생각의 흐름을 맡기기보다 자꾸 뭔가를 하려는 나를 본다.

책에다 긁적이며, 포스트잇에다 의미있는 구절을 적기도 하며, 사진을 찍어 남기려는 등......

'참, 피곤하다' 그래서 반(半)을 읽은 지점에서 그냥 오롯이 책에만 집중했다.

내 마음에게 주는 비밀, 귓속말이다. 쓰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의 자세라 할까?!

책 「소설가의 귓속말」 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듯해서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읽으면서 그 느낌을 흉내냈다. ^^

이렇게 책 읽으면서 나의 읽기와 쓰기를 생각해본다.

 

 

안에 담고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꺼집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하고, 부침을 거듭해야만 할까?

모든 예술가(창작자)들의 고민이란 생각이 든다.

'다르게 보고, 낯설게 보기'는 내 안에서 재해석되어진다. 꼭 필요한 과정이리라.

   익숙해지지 않는 것, 섣불리 규정하고 넘겨짚고 유형화하고 관성에 넘어지지 않는 것, 벼르고 깨어 있는 것. 집중하는 것,
   참여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고독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것, 모든 것을 지금 처음 접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
   모든 사람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나고 모든 소식을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 것, 해질 무렵의 하늘이나 특정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나무의 자태나 골목길에 매달린 간판이나 그 간판에 덮인 먼지들이나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 바닥의 커피 찌꺼기나,
   무엇이든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경이로움을 가지고 보는 것, 그런 것.... (136~137쪽)


쓰고 싶은 것을 쓰거나 써야 하는 것을 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쓰지 못하고, 써야 하는 것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쓰지 못한다. (78쪽)

책에는 이런 말의 유희들이 넘쳐난다. 모호하고 단순한데, 귀에 꽂히는 문장들이다.

반복적이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한데,... 쓰기에 있어서 내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 듯 해서 옮겨보았다.

글 쓰려고 모니터를 켰을 때 멍~해진다. 한참동안 모니터를 본다.

마음이 내키지 않나보다. 그래도 어떤 책에서는 몇 문장이라도 쓰라고 한다.

딱히 영감이란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엉덩이 붙여서 오랫동안 앉아있는 연습이 나에게 필요하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다.
   독자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이 독자이고, 책을 읽을 때만 독자인 것처럼,
   소설가 역시 소설을 쓸 때만 소설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57쪽)

쓰기와 읽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 생각한다. 주체가 아니라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고, 독자가 책을 읽고, 요리사가 요리를 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

이런 행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소설가, 독자, 요리사, 화가 등 본질적이고 능동적인 이름을 획득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세상에는 하지도 않으면서 이름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본연의 행위에 충실해야 이름값을 할 수 있다.

꽃은 피었기에 꽃이고, 새는 날개를 펴서 하늘을 훨훨 날았기에 새이다. 물은 흐르기에 물이다.

그냥 얻어지고 불려지는 이름은 세상에 없다. 태어난 아이도 점점 커가면서 모두 제 몫의 삶을 살아낸다.

 

   문학이 늘 대단한 일을 일으키고 항상 요란한 관심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심리와 한통속일 것이다.
   아픔을 내장하징 않은 문학, 가지가지 욕망의 주문에 따라 기획되고 전시되는 문학이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한쪽 구석에는 그러나 아직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의 간절함을 피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잡는 문학이 쓰이고 읽히고 있다고 믿고 싶다.
   가끔 뜻밖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 그런 곳이라는 것도. (75쪽)

문학의 지향점이란 것은 알고 있는데, 쉽지 않다. 지금 우리의 문학은 시장 논리에 의해 사고 팔리니.

순수한 문학적 고뇌보다 상업적으로 흘렀다. 시장의 구미에 맞게 책이 편집되고 있다.

은연중에 작가들도 자기만의 글을 쓰기보다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안타깝다.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데...... 소설가란 이름 타이틀을 내고 쓰고 있다는 것 나만 그렇게 느끼는걸까?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은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읽는 사람이 독자인데, 읽는 사람은 무엇을 읽고 있는걸까?

베셀이란 이름으로 입소문 난 책들은 계속 팔리게 될 것이고 거기서 이름을 얻게 된 소설가는 다음에는 무엇을 쓸 것인가?

 

아프니깐.... 쓴다. 아프니깐...... 읽는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아픔과 슬픔은 공유되지 못한다.

공유되더라도 오롯이 내가 해결해야 될 내 안의 문제이다.

가끔 뜻밖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 문학이 있어야 될 곳이란 생각이 아주 많이 든다.

지금도 그렇다.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은 위로를 받곤 하니깐.

지극히 사적인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잠깐씩 아주 잠깐씩 스며들어오는 외로움이 있기에 나만의 동굴 속으로 피하고 싶을 때 있다.

숨기에 아주 좋은 그 동굴은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게 하는 쓰기와 읽기가 있는 글 속 세상이다.

귓속말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의미있는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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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빗살무늬햇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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