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 google3339f54caf24306f.html
2020. 8. 17. 21:19
728x90
반응형

2020년 2월 말부터 경험하지 못한 혼돈의 시간이 펼쳐졌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가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마스크를 쓰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단계적으로 하게 되었고, 방역수칙이란 것이 삶 속에 들어왔고

확진자 동선에 대한 안전안내문자가 수시로 스마트폰을 통해 통보되었다.

확진자가 줄어들다가도 무증상 확진이 늘어났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고, 유무급 휴가가 늘었다.

사업체를 정리하는 곳도 많아졌고, 소비를 활성화시키고 가계 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재난지원금도

빠르게 지급되고 사용되어졌다. 아이들은 듣고 보도 못한 원격수업이란 것을 하게 되었고, 등교수업과

병행하고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사라지지 않고, 변이를 일으키며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깜깜이 감염 상태에 놓여있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배움에 있어서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

학교에서의 대면수업 할 땐 느끼지 못한 불안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진다.

충분한 준비없이 원격수업을 하게 되었고, 학교 대신 아이들은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2020년의 코로나19 감염은 이제 모든 분야에서 지금과는 다른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는 신호를 준다.

특히, 앞으로의 '교육'이란 분야는 더 깊이 숙고해야 될 것 같다.

책 <교실이 없는 시대가 온다> 앞으로의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될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온전히 교육 그 자체를 생각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일률적으로 절대적인 평가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있다. 어릴때부터 사교육이 시작된다.

나이에 맞게 배워야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우리 교육은 대학입시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호기심을 억누르는 교육은 아이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모두가 한 길로 가기를 강요당한다.

다양성과 개성이 무시되고, 대학입시에 올인한다.

'우리는 학생들이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게 이끌기보다, 우리가 추정하는 바에 근거해서 그들의 잠재력을 제한한다.'

이런 교육 현실 속에서 교육의 새로운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이때까지의 틀과 양식이 너무 공고하니깐.

그러나, 이제 상상하기 힘든 다른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하듯, 시대에 맞게 변화가 필요하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육방식(대면교육/많은 학생수/주입식교육 등)만으로 한계가 있다.

아이들 맞춤 수업방식의 다양화와 대화와 소통, 기술의 융합이 필요하다.

교육이 왜 백년대계인지 이 책을 통해 알 것 같다.

잘못 궨 단추를 바로잡으려면 시간과 사회적 합의, 경제적 비용 등 많은 부담이 들지만 그럼에도 꼭 해야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지금과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든다면.

더이상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삶에 동기부여가 되도록 불을 지피는 일이 교육이라 했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학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어른의 일이다.

직접 해보면서 그 속에서 답을 찾고,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란 생각이 든다.

좋은 질문을 할 때 좋은 답이 대개 나오는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단답형 질문과 답에 익숙해져있다.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읽고 배워야 하는데 읽기보다 외우는데 익숙해져있다.

피드백 없는 일방적인 수업 방식은 아이들을 기계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잘 길들여진 아이들은 수동적이고 자유롭지 않은데.....

 

책에서는 기술이 교실에 미치는 영향과 컴퓨터를 활용한 다양한 수업방식의 자유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좋은 것은 알겠는데, 기술을 보급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나마 낫은 대안으로 스마트폰을 활용한 사물인터넷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기술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학습이 디지털 네이티브들에게 더 관련성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기술을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문학이 살아 움직이게 했다'

어떤 한 과제를 내어주고 혼자가 아닌 조별로 공부를 하면서 함께 협력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재연하고

동영상을 만들기도 하면서 활기를 불어넣는 수업,..... 아이들은 일방적 수업 속 방관자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며 수업의 주도자가 된다. 기술과 교육, 교사의 가르침, 아이들의 자발적 참여가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도전 기반 학습]의 중요성이다.

학생들의 마음을 끄는 학습을 만드는 수단으로 협력해서 스스로 도전을 만들어내도록 격려받는다.

도전과제로 학생들은 주인의식, 참여와 동기부여를 높인다.

그렇다고 도전 기반 학습이 저절로 이뤄지는 부분은 아니다. 시간과 자원, 교수법의 변화가 필요하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으니 많은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양성의 측면에서 시도를 해봐야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교실을 상상해봤다. 조용한 교실이 아닌 북적북적한 교실, 행복해지는데.....

피곤해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앉아있는 아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선생님의

힘 없는 목소리, 생기가 돌지 않는 교실은 더이상 없을 것 같다.

평균이란 잣대만 없어진다면 교육에 숨 쉴 틈이 있지 않을까!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한 문장으로 써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회에 건강하고 바른 교육을 받은 구성원들이 많아진다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살리지 않을까.

이 때를 계기로 좀 낫은 대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 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는 다양하고 기발한 의견들이 나오지 않을까.

창의성, 협력, 도전...... 허공에 붕~ 뜬 소리가 아니라 우리 교육 텃밭에 뿌리를 내렸음 좋겠다.

교육에 대해 진심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다.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2020. 8. 7. 21:13
728x90
반응형

요즘 나오는 책들은 제목도 참 멋지게 잘 지었다.

그 제목 따라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내 삶과 무관하지 않은 책일 것 같은 느낌에 쉬이 끌린다.

삶의 작은 균열(게으름과 무기력증....)에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음에 마음이 놓인다.

그 도구가 책이라서 쉬어간다. 만약 내가 집순이가 아니었다면 밖으로 돌아다녔을 듯....

아비토끼(=신랑)는 참 건전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매번 말한다.

주변을 보더라도 꾸준하게 책 읽는 사람은 드문 편이니까.

건전한 취미가 어쩌면 내 생각과 마음을 유연하게 해서 간혹 찾아오는 삶의 균열을 메우는 약이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더 친하게 가까이 지내려고 한다^^

 

매일 흔들리지만 그래도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책을 읽었다.

'흔들리지만'의 동사+but 에 시선이 갔다. 매번 흔들리지않고 순탄하게 지나가는 삶이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낸다. 시간이란 약을 처방전으로 받아서.

어느 누구는 금방 낫고, 또 누군가는 아물기까지 시간을 더 필요로 하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이 한 뼘씩 자란다.

별 일 아니듯 무난하게 지나가는 보통의 삶을 보낸다. 그렇다고 평안한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하지만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한다. 그것을 크게 문제삼지 않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내 마음의 일이니까.

 

일상 속에서 풀어내는 누군가(작가)의 이야기는 나와 너, 우리의 이야기다.

나도 이럴 때 있는데, 나도 그랬는데.... 그렇게 그 이야기에 곁을 내어준다. 은연중에 위로를 받는다.

모든 삶의 공간에서 가까이 있고 마주하는 사람이나 자연, 사물에게서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곁을 내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에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보폭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란 것을 요즘 많이 느낀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된다.

코로나19로 다른 해보다 일상의 균열이 많이 일어났다. 내 자리에서 해왔던 일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마음이 조급할 수 있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찬찬히 할 일들을 찾아 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생각들도 덩달아 많아져 샛길로 빠지지만... 잠잠히 기다린다.

일상이 회복되기까지를.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냉동고를 열어 초콜릿 조각 하나를 입에 넣는다. 어릴 때 간식을 잘 먹지 않는 편이었는데

오히려 나이가 드니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같이 단 것을 찾게 된다.

카페에서도 핫초코처럼 단 음료만 주문한다. 씁쓸한 일이 자꾸만 많아져서일까.

내 마음에도 달콤함이 필요하다." (42쪽)

마트에 가면 견과류로 똘똘 뭉친 초코 에너지바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집는 나를 보고 놀랜다.

딱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지만, 그래도 입이 궁금할 때 먹으면 잠시나마 행복하니 먹는 기쁨이 나쁘지않다.

시간이 흐르면 단 것 보다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함이 좋아지는데, 어느 날은 카라멜 마끼아또의 달달함을 찾는다.

나도 이것저것 군입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음식에 대해 바뀐 입맛과 기호가 참 신기하다.

 

글과 그림도 덤덤하게 담백하게 소박하게 잘 쓰고 그리는 작가의 삶을 따라가보니 내 삶이 자연스레 들어온다.

삶의 모양이 다르지 않구나. 되도록이면 둥글게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는 흔적들이 다 비슷하네.

그려진 그림도 마음에 닿아서 사진을 찍어뒀는데, 편집 하고 올리고 지우기를 여러번.....

읽을 때 닿았던 글과 그림이 내가 적고 있는 이 글 속에 넣으려고 하니 내 옷이 아닌 듯 맞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넣지 않아도 그냥 덤덤한  내 일기장 같은 글만으로도 좋아보여서^^ 내 삶이니깐.

어떤 날들보다 마음이 흔들려 위로가 필요할 때 무엇을 하든지 나에게 시간을 주는 일은 꼭 필요하리라.

나는 뻥~ 뚫린 맑고 파아란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로 했다.

밤이면 가장 선명하게 반짝이는 별을 찾아보는 것도 좋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깐 멍하니 있는 것도 괜찮고.

모든 일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거든^^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2020. 8. 3. 11:41
728x90
반응형

그림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깊이 하게 되고, 넓고 다양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음, 뭐랄까? 글이 아닌 그림만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나에게 흔적을 남긴다.

아이들에게 그림책 넘기면서 구경시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림책은 삶의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을 축소시킨 듯 해서 '읽기'보다 '보기'이다.

보는 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이 더 많이 해야 되는 부분 같아서 어른들의 그림책 보기를 추천한다.

내 아이에게 읽어주려고 본 그림책에 내가 매료되어 지금까지 챙겨 보고 있다.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에게 그림책은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추억의 뭉클함으로 다가올 때 있다.

그 느낌이 좋아서 가까이 한다. 그림책 읽고 보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 때문이다.
   색, 크기, 음영, 구도, 비율, 질감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림책은 종종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곤란하다. 요악하면 한없이 시시해진다.
   나를 눈물 쏟게 한 이야기들 조차 그 시시함을 피해 갈 길이 없다.
   다 아는 이야기, 어디서든 한 번은 들어봤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그림책이라는 제한된 형식 속에서
   여전히 새롭게 만들어진다. 시를 닮은 그림의 언어로. (120쪽)

 

그림책을 함께 읽고 그림책으로 삶을 나누고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만나는데, 그 어려움들을 그림책과 연결시켜 삶의 지혜를 얻는 경우도 많다.

어떤 그림책이 도움이 되었고 그 속에서 만나는 이야기는 실제로 우리의 삶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읽은 그림책과 그 속에서 얻은 느낌들을 함께 공유하는 책을 읽음은 또 다른 위로를 선물해준다.

<이상하고 자유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책이 그렇다.

 

저자는 비혼이고, 여성, 집사, 프리랜서, 채식지향주의자, 그림책 읽는 어른... 소개한다.

소개처럼 자신이 지나왔던 시간과 삶들에 대해 조근조근 말한다.

읽고 보았던 그림책들 속에서 느꼈던 이야기들이 함께 버무려진다.

비혼이고 채식지향주의자 삶이 조금 아주 조금 낯설게 여겨지지만, 다르다고 틀린 삶은 아니니깐

그 삶도 있구나 이해할 뿐이다. 글 곳곳에서 저자의 자유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얽매이지 않는 그 자연스러운 자유로움에 닿는다.

그림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는데 한 번만 읽어 본 사람은 없다.

비단 그림책만 그럴까 싶지만, 그 매력이란 것은 읽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세계.」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 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은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 (중략) 나는 언제나 오늘의 나만큼만 산다. (174~175쪽)

책을 읽고 그 느낌을 나만의 느낌으로 다시 재구성해야 하는데, 늘 쉽지 않았다.

읽고 쓰는 것을 10년 이상이나 했는데도 여전히 고민한다.

오히려 처음 읽고 쓸 때의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좋았는데, 지금은 나 스스로 재단을 한다.

얼마나 더 잘 쓸려고 하는가? 그럴수록 더 낯설어지는데.....

책을 읽음으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만난다. 그 세계도 내 경험 속에서 다시 재생된다.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도 모두 각각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늘 내가 읽었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다른 느낌, 비슷한 생각으로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 대단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덤으로 선물받은 삶이라 생각된다.

 

그림책 속 이야기와 삶 속 이야기를 잘 버무려낸 책들은 많다.

많은 책들 속에서 읽는 이와 교감하는 책을 만난다는 것은 드물다. 접점이 있어야 하니깐.

어떻게 하면 시간이 흐른만큼 잘 나이들어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할 듯 싶다.

40 중반에서 50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잘 나이듦에 대해 기대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끼는 마음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과 타자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사람.」

이런 나이듦으로 나아간다면.......... 좋지 아니한가!!!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2020. 7. 28. 10:55
728x90
반응형

혼잣말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인데, 뭔가 신선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유를 하다니....

가장 -체하기를 잘 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나리오 상의 연기자(배우)들이 아닐까.

근본적으로 그 인물들을 만들어낸 작가(소설가)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인물들에게 각각의 말을 준다.

그 인물에게 부여된 조건에 맞는 목소리와 어조와 낱말을 골라 넣는다."

숨겨진 나의 삶, 나를 가장 드러내는 방법이 다른 사람을 통한 감정이입이란 도구를 통해 재현된다.

그래서 쓰는 것과 쓰는 사람은 흥미롭다. 자신의 결핍과 상실의 경험을 펼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니까.

쓰는 사람(소설가)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까? 「소설가의 귓속말」 많이 궁금해.

귓속말은 속닥속닥~ 비밀스런 말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공유하는 것인데,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게 무엇일까?

찬찬히 읽어보았다.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자연스레 이런 부류의 책이 궁금하다.

저자가 알기 쉽게 잘 쓰는 것 같다. 특히,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했는데 꽤 특별하게 다가왔다.

읽은 책과 줄거리, 삶의 경험한 부분 등 글 쓰기와 관련해서 잘 어우러진 듯 하다.

쉽게 쓰여졌다고 허투루 쓴 글이 아니었다. 읽는 사람의 성향과 눈높이에 맞았다고 생각된다.

의미있는 말들도 많아 메모지에 긁적여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은 어쨌든 남겨야하니깐. 매번 부담스러운 행위지만 뿌듯함도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에서 나와 합이 맞는 책이 있다. 구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크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느끼지만 읽는 마음가짐(자세)이/가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책이 나에게 말 걸어오는 모양새가 다르다.

책에 대해 미리 재단하는 자세가 안 좋은 것 같다.

내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 책과의 소통은 물 건너가고 형식적으로 읽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읽는 내가 마음을 주면 그 책은 어느새 내 생각의 흐름을 탄다.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읽으려는 마음도 과하게 되면 몰입을 방해한다.

공부하듯이 문장을 다 안으로 채우려고하면 지치게 된다.

읽고 정리하는 것에 부담이 있으니 자연스런 읽기에 생각의 흐름을 맡기기보다 자꾸 뭔가를 하려는 나를 본다.

책에다 긁적이며, 포스트잇에다 의미있는 구절을 적기도 하며, 사진을 찍어 남기려는 등......

'참, 피곤하다' 그래서 반(半)을 읽은 지점에서 그냥 오롯이 책에만 집중했다.

내 마음에게 주는 비밀, 귓속말이다. 쓰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의 자세라 할까?!

책 「소설가의 귓속말」 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듯해서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읽으면서 그 느낌을 흉내냈다. ^^

이렇게 책 읽으면서 나의 읽기와 쓰기를 생각해본다.

 

 

안에 담고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꺼집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하고, 부침을 거듭해야만 할까?

모든 예술가(창작자)들의 고민이란 생각이 든다.

'다르게 보고, 낯설게 보기'는 내 안에서 재해석되어진다. 꼭 필요한 과정이리라.

   익숙해지지 않는 것, 섣불리 규정하고 넘겨짚고 유형화하고 관성에 넘어지지 않는 것, 벼르고 깨어 있는 것. 집중하는 것,
   참여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고독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것, 모든 것을 지금 처음 접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
   모든 사람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나고 모든 소식을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 것, 해질 무렵의 하늘이나 특정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나무의 자태나 골목길에 매달린 간판이나 그 간판에 덮인 먼지들이나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 바닥의 커피 찌꺼기나,
   무엇이든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경이로움을 가지고 보는 것, 그런 것.... (136~137쪽)


쓰고 싶은 것을 쓰거나 써야 하는 것을 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쓰지 못하고, 써야 하는 것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쓰지 못한다. (78쪽)

책에는 이런 말의 유희들이 넘쳐난다. 모호하고 단순한데, 귀에 꽂히는 문장들이다.

반복적이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한데,... 쓰기에 있어서 내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 듯 해서 옮겨보았다.

글 쓰려고 모니터를 켰을 때 멍~해진다. 한참동안 모니터를 본다.

마음이 내키지 않나보다. 그래도 어떤 책에서는 몇 문장이라도 쓰라고 한다.

딱히 영감이란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엉덩이 붙여서 오랫동안 앉아있는 연습이 나에게 필요하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다.
   독자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이 독자이고, 책을 읽을 때만 독자인 것처럼,
   소설가 역시 소설을 쓸 때만 소설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57쪽)

쓰기와 읽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 생각한다. 주체가 아니라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고, 독자가 책을 읽고, 요리사가 요리를 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

이런 행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소설가, 독자, 요리사, 화가 등 본질적이고 능동적인 이름을 획득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세상에는 하지도 않으면서 이름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본연의 행위에 충실해야 이름값을 할 수 있다.

꽃은 피었기에 꽃이고, 새는 날개를 펴서 하늘을 훨훨 날았기에 새이다. 물은 흐르기에 물이다.

그냥 얻어지고 불려지는 이름은 세상에 없다. 태어난 아이도 점점 커가면서 모두 제 몫의 삶을 살아낸다.

 

   문학이 늘 대단한 일을 일으키고 항상 요란한 관심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심리와 한통속일 것이다.
   아픔을 내장하징 않은 문학, 가지가지 욕망의 주문에 따라 기획되고 전시되는 문학이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한쪽 구석에는 그러나 아직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의 간절함을 피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잡는 문학이 쓰이고 읽히고 있다고 믿고 싶다.
   가끔 뜻밖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 그런 곳이라는 것도. (75쪽)

문학의 지향점이란 것은 알고 있는데, 쉽지 않다. 지금 우리의 문학은 시장 논리에 의해 사고 팔리니.

순수한 문학적 고뇌보다 상업적으로 흘렀다. 시장의 구미에 맞게 책이 편집되고 있다.

은연중에 작가들도 자기만의 글을 쓰기보다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안타깝다.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데...... 소설가란 이름 타이틀을 내고 쓰고 있다는 것 나만 그렇게 느끼는걸까?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은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읽는 사람이 독자인데, 읽는 사람은 무엇을 읽고 있는걸까?

베셀이란 이름으로 입소문 난 책들은 계속 팔리게 될 것이고 거기서 이름을 얻게 된 소설가는 다음에는 무엇을 쓸 것인가?

 

아프니깐.... 쓴다. 아프니깐...... 읽는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아픔과 슬픔은 공유되지 못한다.

공유되더라도 오롯이 내가 해결해야 될 내 안의 문제이다.

가끔 뜻밖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 문학이 있어야 될 곳이란 생각이 아주 많이 든다.

지금도 그렇다.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은 위로를 받곤 하니깐.

지극히 사적인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잠깐씩 아주 잠깐씩 스며들어오는 외로움이 있기에 나만의 동굴 속으로 피하고 싶을 때 있다.

숨기에 아주 좋은 그 동굴은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게 하는 쓰기와 읽기가 있는 글 속 세상이다.

귓속말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의미있는 책 읽기였다.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2020. 7. 22. 14:45
728x90
반응형

분식하면 항상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음식이 떡볶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어떤 재료를 넣더라도 자기만의 떡볶이가 된다.

주말이면 친한 교회 동생들을 불러서 수다꽃을 피울 때 먹거리가 빠지면 섭섭하지.

떡볶이와 라면, 찐만두 조합으로 뚝딱 만들어냈다.

군만두가 아니라 찐만두? 달고 맵고 짠 음식 속에 찐만두는 담백하면서 자극적인 맛을 중화시켜준다.

무엇보다 아빠와 늘 자주 해먹었던 음식인지라 군만두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분식집이 있는데, 거기서 튀김과 순대를 사서 떡볶이 라면과 함께 먹었다.

떡볶이를 분식집에서 사왔던 기억은 별로 없다. 멸치육수를 내어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

지금은 비릿한 멸치육수 대신 맹물에 이것저것 다 가미된 자극적인 어느 프랜차이즈 떡볶이를 흉내내고 있다.

떡볶이...... 자연스레 수다스러웠고 재미났던 그 때 주말 오전이 생각난다.

'언니야, 뭘 이렇게 또 많이 했노? 연희야, 뭔데..... 하여튼 부지런하다니까.'

다 먹고 난 후 냉동실에 넣어둔 하드(아이스크림 바)를 꺼내 먹는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을 씻어야되니^^

무엇을 할까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그 사이에서 신앙과의 조화.....

달고 짜고 감칠맛 나는 빨간 떡볶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함께 있으면 좋았고 위로받는 시간이었지만

모두가 간 뒤 허허로이 홀로 되는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도 학교 앞에서 파는 떡볶이 맛에 길들여져있다. 쭈욱쭉~ 늘어나는 치즈 떡볶이는 아이들 입맛과 취향에 맞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떡볶이는 이제 칭찬받지 못한다. 편의점에서 파는 떡볶이는 신세계다.

모짜렐라/체다 치즈만 냉장고에 있으면 된다. 아이도 자기만의 레시피로 이젠 떡볶이를 즐긴다.

느릿하게 음식을 해먹는 수고로움 대신에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무엇이든 배달되는 빠름과 편함에 익숙해져있다.

본연의 떡볶이보다 다양하게 첨가되는 떡볶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잡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떡볶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반복되고 재생된다.

재밌는 추억이 되기도 하고 아프면서 씁쓸한, 쓸쓸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떡볶이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담은 10편의 이야기가 있다. 책「당신의 떡볶이로부터」

분홍빛 겉표지와 빨간 속표지가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남들은 떡볶이에 대해 어떤 기억(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떡볶이에 대한 각각의 에피소드가 신선했다. 떡볶이에 대한 소재가 친밀해서 더 재밌게 읽은 것 같다.

특히 '떡볶이'가 화자인 이야기 <쫄깃쫄깃 탱탱의 모험> <떡볶이 초끈이론>은 오롯이 떡볶이 입장에서

쓰여져서 먹는 입장에서 뭔가 모를 경건함과 예를 갖춰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떡볶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그들의 운명이 갈라지는지 다소 엉뚱하면서 흥미로웠다.

시간을 넘어(타임머신) 떡볶이의 맛이 얼마나 경이롭고 중독성이 있는지 재미있게 버무려낸 이야기는 정말 기발한 듯 싶다.

<좀비와 떡볶이> <서모라의 밤>은 마약 떡볶이와 중독의 의미가 충분히 =의 의미로 쓰일 수 있음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떡볶이를 처음 먹어 본 사람의 반응은 다양한데, 호불호가 없을 정도로 떡볶이는 시간을 거슬러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이었다.

임금이 불로초를 찾는게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떡볶이를 구해오라 하고, 좀비가 득실대는대도 든든하게 지켜주던

울타리에서 추방자로 내쫒기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원재료 구하고 떡볶이를 만드는 위험을 감행하는 것은 오로지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것은 결단이었다. 떡볶이 단짝 친구인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라면의 그 맛은 또 어떤가?!

떡볶이와 라면을 절묘하게 같이 등장시키는 작가의 말 센스에 크크큭 웃음이... 세상에 둘이 먹다가도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일 터, 중독성 짙은 음식을 찾고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사소한 욕심이 삶에 아주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구나 생각했다.

<당신과 김말이를 중심으로>, <유라TV> 이야기는 씁쓸한 맛이었다. 삶을 아주 쓸쓸하게 만드는.

먹고 싶은 것도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먹지 못하는 눈치를 봐야하는 삶과 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만하는 보여주기식

상황에서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즘 먹방 유튜브가 대세이다. 누구나 궁금한 알고 싶은 컨텐츠를 개발하기보다

반복이다. 많은 유튜브들이 같은 장소에서 찍은 영상이 계속 올라온다. 새로운 정보가 아닌 같은, 차별성이 없다.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먹기 싫은 것을 먹어야 하고, 아이들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

누가 얼마나 더 자극적인지 경쟁하는 것 같다. 돈이 바짝 몰리는 순간을 위해서.

대학에서 교수가 되기 위해 석,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한다. 눈 밖에 난다는 것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가장 무서운 말이 된다. 기껏 떡볶이인데도, 곁가지로 먹는 튀김조차도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존중된다.

생각해보니 아주 사소한 '튀김 1인분만 주세요' 할 때 우리는 그 튀김 1인분이 담아주는 사람 마음대로였다. 우리의 선택이 아닌.

누구나 오징어 튀김, 고추 튀김, 김말이, 채소 튀김 등 선호하는게 있는데 '오징어 튀김 중심으로' 말하기엔 용기가 필요한가보다.

'싫습니다.' 이 한 마디의 의미가 삶을 얼마나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지 생각이 많아진 이야기들이다.

학교 앞 떡볶이집 아줌마가 다른 친구들은 7개 주고, 나는 6개만 준다. 설마 먹는 것 가지고.... 아니겠지 하면서도 부아가 난다.

매일 그러니깐 치사한 줄 알면서도 확인해본다. 이 떡볶이집 아줌마가 같은 반 아이 엄마라는 소문이 있던데 혹여나 장난기 많은

내가 상처 준 아이가 있는지, 그 아이가 엄마에게 다 말했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어쨌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다른 아이가 되어본다. 나만 6개 주는 그 떡볶이 때문에...... 첫 이야기가 나를 미소짓게 했다. 당근이쥐라.

다른 것도 아니고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 갯수가 다른 아이보다 매일 적은 것은 신경질 나는 일이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적어 발표하는 시간, 아이는 '떡볶이 아줌마'를 칭찬했다. 분명 반에 아줌마 딸이 있어서 아줌마에게

오늘 발표로 잘 말해줄 것 같아서. 발표도 안 하는 아이가 발표왕도 되다니...그 떡볶이가 뭣이라고.

발표 후 떡볶이는 다른 아이보다 1개 많은 8개가 되었다. 우훗~~ 효과가 있었는지..... 그런데 그 다음 날, 다시 떡볶이는 6개.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떡볶이 아줌마 아이는 누구인가? <컵떡볶이의 비밀>이 밝혀졌다.

떡볶이 아줌마는 자기 딸 제일 힘들게 하는 아이에게 소심한 복수를 한거다^^ 선생님이셨다니......

읽은 이야기들 중에서 아프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 이다.

웃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살아내기 위해 웃어야 했고, 그 웃음이 뭇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그 웃음 때문에 죽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웃음 헤픈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한 청년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기사는 앞다퉈 포장을 한다. 사랑받지 못한 청년의 순정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웃었고 잘 대해줬는데, 떡볶이 청년은 혼자 다르게 특별하게 생각했나보다.

 

「당신의 떡볶이로부터」

내가 먹는 떡볶이는 쌀떡과 밀떡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소화가 잘 되어서 쌀떡을 먹고, 어떤 사람은 옛날 떡볶이의 추억이 생각나서 밀떡을 먹는다고 한다.

쌀떡이든 밀떡이든 빨간 떡볶이는 다 군침돈다.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매운 떡볶이를 못 먹는다. 순식간에 얼굴 빨개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곁들여 먹을 튀김 1인분만 주세요. 특히 오징어와 채소 튀김 중심으로요^^

순대는 빠져도 된다. 대신에 어묵은 옳다. 국물과 함께.

나에게 추억이 깃든 떡볶이, 다음에 언니와 동생들 오면 분식 한 상 차려줘야겠다.

채소뜸뿍 납작만두도 곁들여서. 튀김 보다 내가 잘 하는 전으로 특별구성해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갈까? 2학년이 아닌 모두 4학년과 5학년으로 만나니 이젠 혼자가 아닌

오순도순 가족이란 이름도 함께 등장하겠네. 헤어질 땐 더이상 외롭지 않겠다.

10편의 떡볶이에 대한 이야기 구성이 좋았다. 비슷한 기억과 공감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유리되는

이야기들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같은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사유도 폭넓은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이 좀 많았던 지점은 <당신과 김말이를 중심으로 / p77>에 나온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저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가장 행복할 것인가, 어떠한 선택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없는, 마치 모든게 정해진 메뉴판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메뉴판을 가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모든 공간에서 우리는 개인이 아닌 타인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가고,
   혹은 타인에게 그 공간의 욕망을 중심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합니다.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무디어지고 어느새 유령이 되고 맙니다.

 

떡볶이 맛이 떡볶이 맛이지. 뭐 다른 맛이 있겠나?

비단 떡볶이만이 아니다. 모든 음식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매일 똑같은 듯 같지 않은 삶이 듯,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순한 맛을 먹는 나도 오늘은 기분이 꿀꿀해서 매운 맛을 덜컥 시켜 먹을 수 있다.

삶이 어쩜 그래요...... 하면서.......

다양한 음식 속에서 무엇을 먹을지 자주 선택 장애를 겪지만 먹는 그 자체가 삶의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어떤 사람의 소울푸드는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내는데 도움이 된다.

오늘 하루종일 비 오는데, 뜨끈한 어묵 국물에 단짠 떡볶이가 땡긴다. 대파 크게 썰어넣고.

비 와서 나가기 귀찮지만, 나만의 뚝딱 레시피로 만들어볼까!^^

빗소리와 튀김 냄새가 어우러져 내 발걸음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은 떡볶이 보다 튀김에 진 날이다.

떡볶이에 튀김이 아니라 튀김에 곁들일 떡볶이도 같이 사야되는 날이다.

나의 떡볶이 레시피는 다음 기회에^^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2020. 7. 20. 21:30
728x90
반응형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집 안 공기는 좀 찬데 휑하지 않음은,

봄날의 분홍빛 하늘하늘~ 표지가 참 예쁜 책을 만나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보다.

마음이 설렌다. 어떤 책일까?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

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이런걸까?

함께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외로움이란 감정, 그렇다고 홀로 있고 싶지도 않은 마음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삶에 균열을 만든다.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하게 오랫동안 아프다.

특히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날들과 자주 마주한다.

10대 때 性 정체성 문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할 나름의 개인 사정이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두꺼운 담을 쌓고 산다.

그 오랫 동안의 침묵의 시간을 깨고 나온다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는 20대 중반이다.'게이'란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우울감과 불안, 자학과 걱정,

패배주의적 사고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너무 우울해 생을 다 끝내버릴까 하는 비이성적인

생각도 했고, 사사로운 이익 문제로 이용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기도 했으며, 연인과 헤어지고 망가진 채

버려지기도 했다는 아픈 상처들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져있다.

한편, 자신의 무난하지않은 삶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려는 노력들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이 책은 상처로 점철된 한 사람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위로라고 생각되었다.

젊지만 참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낸 그의 고백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현재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글쓰기를 통해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마음들을 엿보았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번에 정리하고 비워내기란 어렵다.

한창 사춘기 시절에 어린 소년이 性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힘들어할 때, 감당할 무게감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더 빨리 도피하는 법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 때 옆에 누가 있어서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을텐데.....

아이는 너무 일찍 혼자 되는 법을 알았고, 철이 들었다.

 

 

완벽한 치유의 공간에 살고 있지만, 자주 행복하지 않아서 부끄럽다는 그의 고백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나 가슴 한 켠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개인에게도 완벽한 치유란 있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문다고 하지만 다 낫았다고 말할수 없는 것 처럼.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여기에 붙일 수 있을까?

행복하지 않은 것은 수치스런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마음의 문제였다.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평안해지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다.

이 책은 그 내면의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일기장 같다.

은밀한 비밀을 책을 통해 공유하고 싶은 것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거라고

생각하기에 어떻게 하면 소통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책을 읽어가면서 솔직하게 혼란스러웠다. 내가 생각한 책이 아닌데......

그냥 책 제목과 앞 표지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쓰여진 글들도 좋을거야 하며 기대했는데 빗나갔다.

20대 중반의 일찍 어른이 된 어엿한 CEO이면서 잘 나가는 작가이며 강연자, 그리고 그의 삶을 매번 힘겹게

했던 성 소수자로서 삶과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커밍아웃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이 힘겨워했고 고민했던 삶의 편린과 이후의 자아를 찾아가는 노력들을 엿본다.

찍은 사진과 글과 詩를 통해 참 잘 견뎌왔음을 느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에 얼마나 일상적인 삶을 그리워했을까?

숨겨야 하므로 늘 가면을 쓴 채 다녀야 했던 그 마음이 오롯이 느껴진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가 오랫동안 내 자신을 잃게 돼.'

이 말이 주는 무게감에 대해 생각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그럼에도 다른 그 누구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책 <삶을 배우는 작은 학교>에서

   자아를 읽어버리기 전에 다른 사람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그어두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여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지려 하면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됩니다. 
   깊숙이 내면이 이끄는 방식대로 사십시오.

자신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한다는 것을 저자는 알았고 건넨다.

그 목소리가 이제서야 안심이 된다. 그도 글을 쓰면서 회복을 했나보다. 나름 노력을 많이 했나보다.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적었다. 그리고 또 오지랖 넓게 짧게 나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적었다.

마음이 끌리는 문장에서 한참동안 머물렀다. 짧게 줄을 긋고 내 마음의 안부도 물어본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 저자도 그랬을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서 괜찮다. 괜찮아 질 것이다 라고^^

   자기 자신과 지금 하는 일을 믿고 계속 나아가라.
   중간에 나타나는 퍼즐 조각을 줍고 지식을 쌓고 배워가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결국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할테고, 뒤돌아보면 완성된 원이 보이면서 이상한 길로 돌고 돌아온
   이유를 깨달을 것이다. (222쪽)

이 구절이 나에게 지금 가장 의미있는 위로 같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하루 하루의 물들임이란 행위들이 언젠가는 꽃을 피우리라.

의외로 나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었다. 괜찮지 않은 하루가 6번이더라도 1번의 하루 속에서

내 마음이 위로받고 행복했다면 다시 돌아오는 무미건조한 6일의 일상들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란 방은 의외로 소심해서 늘 잘 살펴봐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반응형
Posted by 빗살무늬햇님

google-site-verification: google3339f54caf24306f.html